[손경호 수요칼럼] 선심(善心)과 수양은 깨달음의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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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고문·교육행정학박사 손경… 작성일21-07-13 18:26본문
↑↑ 논설고문·교육행정학박사 손경호사람의 마음씨를 두고 품격이나 품위를 가리켜 인품이라 하고 성질과 됨됨이를 성품이라 한다. 그러면 인간이 태어날 때는 어떤 마음씨를 갖느냐에 따라 선(善)하다고도 하고 또는 악(惡)하다고 한다.
전국시대 맹자가 주장한 중국 철학의 전통적 테마인 성론의 하나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학설인 '성선설'과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가 주장한 학설로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윤리 사상이 있다.
인간의 도덕적 수양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던 유가의 정통사상인 '성악설'과 아직도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심성은 참되고 변하지 아니하는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선( 善)과 깊은 반성과 수양을 통해서 얻는 선(禪)의 차이가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글자의 풀이로 선(善)은 '착하다, 좋다'는 의미고, 후자의 선(禪)은 '마음과 터를 닦다, 고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먼저 선량하다는 선(善)은 선행과 도덕과의 관계이고, 심신을 닦는다는 선(禪)은 수양과 정신적 관계에 해당된다.
기독교 성서에는,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 이라 한다. 선은 위대함 속에 있지 않지만, 위대함은 선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선과 악의 구별'에 선이란 권력의 감각,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권력 그 자체를 앙양시키는 것이다. 선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바람의 신속함과 같이 하라고 했다. 만일 사람이 삶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이미 그가 선을 선택할 희망이 없다는 결과다.
어떠한 것도 자연이라는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손에 건너와 악이 되는 경우는 그 순수성이 타락되기 때문이다. 선이란 단순한 성격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이며,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이며, 내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에너지이여야만 한다. 사람의 선행은 하루의 기분에도 영향을 준다. 일에 착한 일이라면 내일 일도 흐뭇할 것이며, 그러면 일주일 내내 즐거운 일 뿐이니라는 경험자의 말도 흐뭇하다.
슬려 문인으로서 한용운 시인의 '선(善)과 인생' 이라는 글에, "선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요, 침적(가라앉음)한 회심(유혹없는 마음)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선(善)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라 했다.
항상 불자임을 자신을 소개한 이청담 선사는, 불교가 만약 인간사회의 이익의 증진을 위하여 가장 이상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지닌 것이라면, 선은 마침내 인간정신의 최고의 소의처(의지하는 곳)가 될 만한 근거를 철학에서 논리를 쫓고 예술에서 수식적 기교를 버리고 남는 것이라고 시인 조지훈의 저서, '영원과 고독을 위한 단상'이란 글에 남긴 말이다.
종교상의 선이란 삼문(三門)의 하나인 열반으로 불도를 완전하게 이루어 일체의 번뇌를 허탈한 최고의 경지인 세 가지 문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좌선인 것으로 수양의 단계라 한다.
수양의 원래 풀이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지혜·도덕을 닦는것으로 정신 일도에 해당된다. 인간만이 가지는 별난 성격의 특성으로 육체의 욕망, 교만과 욕심인 세가지 유혹이 있다. 그로 인하여 모든 불행이 과거에서 미래에까지 인류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서운 병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수양 이외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일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였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더욱 이끌어 가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수양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배운것의 경험과 말과 행동의 자제가 포함된다. 인간의 마음이 선으로 다다르면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라 했다. 빨갛게 단 쇠는 가볍다. 수양이 바로 도(道)이며 양반의 품위다.
논설고문·교육행정학박사 손경… kua348@naver.com
전국시대 맹자가 주장한 중국 철학의 전통적 테마인 성론의 하나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학설인 '성선설'과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가 주장한 학설로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윤리 사상이 있다.
인간의 도덕적 수양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던 유가의 정통사상인 '성악설'과 아직도 대두되고 있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심성은 참되고 변하지 아니하는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선( 善)과 깊은 반성과 수양을 통해서 얻는 선(禪)의 차이가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글자의 풀이로 선(善)은 '착하다, 좋다'는 의미고, 후자의 선(禪)은 '마음과 터를 닦다, 고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먼저 선량하다는 선(善)은 선행과 도덕과의 관계이고, 심신을 닦는다는 선(禪)은 수양과 정신적 관계에 해당된다.
기독교 성서에는,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 이라 한다. 선은 위대함 속에 있지 않지만, 위대함은 선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선과 악의 구별'에 선이란 권력의 감각, 권력에의 의지, 그리고 권력 그 자체를 앙양시키는 것이다. 선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바람의 신속함과 같이 하라고 했다. 만일 사람이 삶에 무관심하게 된다면 이미 그가 선을 선택할 희망이 없다는 결과다.
어떠한 것도 자연이라는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손에 건너와 악이 되는 경우는 그 순수성이 타락되기 때문이다. 선이란 단순한 성격일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이며,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이며, 내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에너지이여야만 한다. 사람의 선행은 하루의 기분에도 영향을 준다. 일에 착한 일이라면 내일 일도 흐뭇할 것이며, 그러면 일주일 내내 즐거운 일 뿐이니라는 경험자의 말도 흐뭇하다.
슬려 문인으로서 한용운 시인의 '선(善)과 인생' 이라는 글에, "선이라면 불교에만 한하여 있는 줄로 아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불교에서 선을 숭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은 종교적 신앙도 아니요, 침적(가라앉음)한 회심(유혹없는 마음)도 아니다. 다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선(善)은 전인격의 범주가 되는 동시에 최고의 취미요, 지상의 예술이다. 즉 정신수양의 대명사"라 했다.
항상 불자임을 자신을 소개한 이청담 선사는, 불교가 만약 인간사회의 이익의 증진을 위하여 가장 이상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지닌 것이라면, 선은 마침내 인간정신의 최고의 소의처(의지하는 곳)가 될 만한 근거를 철학에서 논리를 쫓고 예술에서 수식적 기교를 버리고 남는 것이라고 시인 조지훈의 저서, '영원과 고독을 위한 단상'이란 글에 남긴 말이다.
종교상의 선이란 삼문(三門)의 하나인 열반으로 불도를 완전하게 이루어 일체의 번뇌를 허탈한 최고의 경지인 세 가지 문으로 마음을 가다듬는 좌선인 것으로 수양의 단계라 한다.
수양의 원래 풀이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지혜·도덕을 닦는것으로 정신 일도에 해당된다. 인간만이 가지는 별난 성격의 특성으로 육체의 욕망, 교만과 욕심인 세가지 유혹이 있다. 그로 인하여 모든 불행이 과거에서 미래에까지 인류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서운 병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한가지 수양 이외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일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였을 뿐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더욱 이끌어 가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을 수양이라 하는데 거기에는 배운것의 경험과 말과 행동의 자제가 포함된다. 인간의 마음이 선으로 다다르면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라 했다. 빨갛게 단 쇠는 가볍다. 수양이 바로 도(道)이며 양반의 품위다.
논설고문·교육행정학박사 손경…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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