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22. 쉬어가는 글 : 고전 이야기의 한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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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5-24 19:48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를 20회 정도 쓰다보니 몇가지 의문이 생기는 한편, "독자들에게 사랑 받는 좋은 기사가 되고 있느냐?"의 반성이 나온다. 이야기의 원전(原典)이 되는 각종 고서(古書 :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사 등)의 원문을 근간으로 삼고, 석씨대종회에서 발간한 석씨역사를 종합하여 집대성한 숭신전지(崇信殿誌)의 내용도 참조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왔었다.
그러나 그 영역과 번역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회수를 거듭할 수록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연재되어야 좋을텐데, 실은 유사한 내용들의 반복이 대부분이었다. 즉 왕의 혈통가계와 인재 등용, 침략자와의 전쟁기록이나 간략한 치세, 기후와 재해 등 깊이도 없는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주 재원(主 財源)이 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한 제작연도와 집필관계를 재확인해 보았다.
1. 삼국사기(三國史記)는 : 1140년에 시작하여 5년 후인 1145년 12월(고려 17대 인종23년 71세)에 金富軾(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編纂(편찬)한 중국의 정사체인 紀傳體(기전체)로 된 삼국시대 역사서이다. 총 50권으로 本紀(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年表(연표) 3권, 志(지) 9권, 列傳(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進三國史記表(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식자층까지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 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①중국문헌이 우리나라 사실을 지니치게 간략하게 기록하였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②현존의 古記(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여야겠다는 것 ③그러므로 왕·신하·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규범을 드러내어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古記(고기) 三韓古記(삼한고기) 新羅古史(신라고사) 舊三國史(구삼국사)와 金大問(김대문)의 高僧傳(고승전) 花郞世記(화랑세기) 鷄林雜傳(계림잡전)과 崔致遠(최치원)의 帝王年代曆(제왕연대력) 등의 국내문헌과 三國志(삼국지) 後漢書(후한서) 晋書(진서) 魏書(위서) 宋書(송서) 南北史(남북사) 新唐書(신당서) 舊唐書(구당서) 資治通鑑(자치통감) 등의 중국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책이다.
2. 삼국유사(三國遺事)는 : 삼국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에 해당한다. 5권 2책이며, 상권인 1, 2권은 주로 역사 사실을 다루었고, 하권에 해당하는 3, 4, 5권은 불교 사실을 다루었다.
내용은 주제에 따라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선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5년 4월 1일 보물 제41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2월 3일 '삼국유사' 권3~5가 국보 제306호로 변경되었다. 다른 판본이 국보 제306-2호이고, 2018년 2월 21일 1512년 간행된 임신본이 국보 306-3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삼국유사' 권2가 보물 제419-2호, '삼국유사' 권4~5가 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 권3~5가 보물 제4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책 모두 신라 석(昔)씨 왕이 재위했던 서기 57년 ~ 356년에 기록된 왕궁실록(王宮實錄)의 전이물(轉移物)이 아니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삼국유사는 1285년에 만들어진 근세(近世)의 책들이다. 따라서 그 내용의 빈약성은 물론 신빙성에도 다소의 의문은 감출 수 없다.
3. 고문(古文), 사료(史料) 등에 의한 번역에는 여유나 아량은 없고 오직 직역(直譯)만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한자 원문을 번역할 때의 예를 들어 본다. 보기 : 漢字 原文→(한글 독음)→우리말 번역' *四年秋七月→(사년추칠월)→4년 가을 7월에 / *旱蝗→(한황)→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 *民飢→(민기)→백성들이 굶주리자 / *發使救恤之→(발사구휼지)→특사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번역에서 임의(任意) 가감은 용납(容納)되지 않는다. 위의 예문 중에서 가뭄과 메뚜기 떼를 번역하면서, 가뭄이 어느정도 심하게 들었는지를 현장감 있게 서술한다던가, 메뚜기떼의 출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또는 그 피해와 뒷 처리는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를 가상하여 실감 나게 보태어 창작했으면 좋겠으나 고사원문(古事原文)을 마음대로 덧붙이거나 창작할 수는 없다는 제한성과 금기가 있다고 본다.
드라마의 시나리오(각본)를 쓰는 경우라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깊이있게 전개하느냐가 설정되면 작가는 제대로된 표현기법으로 독창성과 신선한 자극제를 동원하여 관객들을 만족시켜줄 대중성이 강한 의욕적이고도 창작적인 이야기판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2,000전에 활동하셨던, (평민이나 의인도 아닌)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임의(任意)로 서술 한다면, 불경(不敬)이요 망동(妄動)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이어오는 동안 내용이 단순하여 변화나 흥미가 없었기에 필자(筆者)는 가느다란 원통의 터널을 통과하듯 사방이 꽉 막혀 가감이나 자유가 전혀 없는 답답한 일방통행이었음을 가슴 답답하도록 느꼈지만, 해결책이 없는 고사(古事)이므로 본의가 아니게 단조로운 이야기를 계속해 왔음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변함없는 애독을 바란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그러나 그 영역과 번역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회수를 거듭할 수록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연재되어야 좋을텐데, 실은 유사한 내용들의 반복이 대부분이었다. 즉 왕의 혈통가계와 인재 등용, 침략자와의 전쟁기록이나 간략한 치세, 기후와 재해 등 깊이도 없는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이야기의 주 재원(主 財源)이 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한 제작연도와 집필관계를 재확인해 보았다.
1. 삼국사기(三國史記)는 : 1140년에 시작하여 5년 후인 1145년 12월(고려 17대 인종23년 71세)에 金富軾(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編纂(편찬)한 중국의 정사체인 紀傳體(기전체)로 된 삼국시대 역사서이다. 총 50권으로 本紀(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통일신라 12권), 年表(연표) 3권, 志(지) 9권, 列傳(열전)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부식의 進三國史記表(진삼국사기표)를 통하여 그 편찬 동기와 목적 및 방향을 엿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식자층까지도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 는 사실을 개탄하면서, ①중국문헌이 우리나라 사실을 지니치게 간략하게 기록하였으니 우리 것을 자세히 써야 한다는 것 ②현존의 古記(고기) 내용이 빈약하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여야겠다는 것 ③그러므로 왕·신하·백성들의 잘잘못을 가려 행동규범을 드러내어 후세에 교훈을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古記(고기) 三韓古記(삼한고기) 新羅古史(신라고사) 舊三國史(구삼국사)와 金大問(김대문)의 高僧傳(고승전) 花郞世記(화랑세기) 鷄林雜傳(계림잡전)과 崔致遠(최치원)의 帝王年代曆(제왕연대력) 등의 국내문헌과 三國志(삼국지) 後漢書(후한서) 晋書(진서) 魏書(위서) 宋書(송서) 南北史(남북사) 新唐書(신당서) 舊唐書(구당서) 資治通鑑(자치통감) 등의 중국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책이다.
2. 삼국유사(三國遺事)는 : 삼국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삼국사기'가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입장을 견지한 야사에 해당한다. 5권 2책이며, 상권인 1, 2권은 주로 역사 사실을 다루었고, 하권에 해당하는 3, 4, 5권은 불교 사실을 다루었다.
내용은 주제에 따라 왕력·기이·흥법·탑상·의해·신주·감통·피은·선 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5년 4월 1일 보물 제41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2월 3일 '삼국유사' 권3~5가 국보 제306호로 변경되었다. 다른 판본이 국보 제306-2호이고, 2018년 2월 21일 1512년 간행된 임신본이 국보 306-3호로 지정되었다. 그 밖에 '삼국유사' 권2가 보물 제419-2호, '삼국유사' 권4~5가 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 권3~5가 보물 제4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두 책 모두 신라 석(昔)씨 왕이 재위했던 서기 57년 ~ 356년에 기록된 왕궁실록(王宮實錄)의 전이물(轉移物)이 아니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삼국유사는 1285년에 만들어진 근세(近世)의 책들이다. 따라서 그 내용의 빈약성은 물론 신빙성에도 다소의 의문은 감출 수 없다.
3. 고문(古文), 사료(史料) 등에 의한 번역에는 여유나 아량은 없고 오직 직역(直譯)만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한자 원문을 번역할 때의 예를 들어 본다. 보기 : 漢字 原文→(한글 독음)→우리말 번역' *四年秋七月→(사년추칠월)→4년 가을 7월에 / *旱蝗→(한황)→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 *民飢→(민기)→백성들이 굶주리자 / *發使救恤之→(발사구휼지)→특사를 보내 그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번역에서 임의(任意) 가감은 용납(容納)되지 않는다. 위의 예문 중에서 가뭄과 메뚜기 떼를 번역하면서, 가뭄이 어느정도 심하게 들었는지를 현장감 있게 서술한다던가, 메뚜기떼의 출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또는 그 피해와 뒷 처리는 어떻게 마무리 했는지를 가상하여 실감 나게 보태어 창작했으면 좋겠으나 고사원문(古事原文)을 마음대로 덧붙이거나 창작할 수는 없다는 제한성과 금기가 있다고 본다.
드라마의 시나리오(각본)를 쓰는 경우라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깊이있게 전개하느냐가 설정되면 작가는 제대로된 표현기법으로 독창성과 신선한 자극제를 동원하여 관객들을 만족시켜줄 대중성이 강한 의욕적이고도 창작적인 이야기판을 벌일 수도 있겠지만, 2,000전에 활동하셨던, (평민이나 의인도 아닌) 왕에 대한 이야기를 임의(任意)로 서술 한다면, 불경(不敬)이요 망동(妄動)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이어오는 동안 내용이 단순하여 변화나 흥미가 없었기에 필자(筆者)는 가느다란 원통의 터널을 통과하듯 사방이 꽉 막혀 가감이나 자유가 전혀 없는 답답한 일방통행이었음을 가슴 답답하도록 느꼈지만, 해결책이 없는 고사(古事)이므로 본의가 아니게 단조로운 이야기를 계속해 왔음을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변함없는 애독을 바란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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