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19. 왜의 침공 그리고 죽엽군의 전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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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4-26 19:21본문
↑↑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군사 전쟁사] 기록을 아무리 찾아 봐도 신라가 백제를 침공했거나 괴롭힌 일은 찾아 볼 수가 없고, 반대로 백제와 왜국(일본)이 신라땅을 수시로 침공하거나 약탈로 괴롭힌 기록은 심심찮게 이어져 있었다. 신라는 왜(倭)의 잦은 침략에 지루하도록 시달렸는데, 왜병들은 287년(유례 4)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해 민가와 창고에 불을 지르고 선량한 신라인 1천 명을 볼모로 붙잡아 가는 역대미문(歷代未聞)의 대참사를 당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큰 변란을 겪은지 5년이 지난 서기292년(임자년 왕9년) 6월에 왜병이 또다시 사도성(沙道城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으로 쳐들어 와서 성을 함락시키고 갖은 행패와 무례한 짓거리를 하므로 왕은 일길찬 대곡(大谷)으로 하여금 정예된 군사를 대동하여 사도성으로 출동하여 왜병들이 기세충천하는 진지에서 피비린네 나는 혈전을 벌인 결과 왜병들을 생포하거나 섬멸하므로 사도성을 완전히 탈환하는 대승의 전과를 거두었다.
294년(갑인년 유례 11) 여름 왜병(倭兵)들이 장봉성(長峰城)을 공격해 왔으나 신라군의 완벽한 방어와 퇴격전에 맞서 이기지 못하고 처량하게 도망치듯 물러갔다. 서기295년(을묘년 왕12년) 봄에 왕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왜인들이 빈번히 우리나라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백제와 연합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 가서 아주 그 나라를 격멸시키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할까?"하니 서불한(舒佛邯) 홍권(弘權)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치 못한데 모험적인 원정을 하면 헤아리지 못할 위험한 일이 생길는지 염려되오며, 황차(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욕심을 가졌으므로 또한 그들과 연합하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일인 줄로 생각되나이다"하자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시고는 왜국 정벌을 그만 두었다.
서기297년(유례 14)에는 이서고국(伊西古國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이 금성(金城 : 지금의 경주)을 쳐들어오자 신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아도 물리치지 못고 곤욕을 치루었다. 이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나타났는데 그 수효는 셀 수 없고 모두 귀에 댓잎(竹葉)을 꽂고 신라군과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 뒤 그들이 누구인지? 어느나라 군사인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간 곳 조차 알지 못하던 중, 누가 와서 말하기를 "미추왕릉에 댓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모두가 그 곳으로 가보니 전에 없던 댓잎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댓잎은 이름 모를 응원군들이 귀에 꽂았던 댓잎과 같은 것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미추왕이 죽어서 비밀스러운 죽엽군사(竹葉軍士)로 도와준 것이라고 알게 되면서 선왕의 음덕을 깨달아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삼국유사'에도'미추왕죽엽군(未鄒王竹葉軍)'조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적국의 명칭이 이서국(伊西國)으로 되어 있다.
석유례왕께서는 서기298년(무오년 유례 15) 10월에 돌아 가셨다. 후계자는 동생인 이찬(伊飡) 걸숙(乞淑)의 아들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왕위를 이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이렇게 큰 변란을 겪은지 5년이 지난 서기292년(임자년 왕9년) 6월에 왜병이 또다시 사도성(沙道城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으로 쳐들어 와서 성을 함락시키고 갖은 행패와 무례한 짓거리를 하므로 왕은 일길찬 대곡(大谷)으로 하여금 정예된 군사를 대동하여 사도성으로 출동하여 왜병들이 기세충천하는 진지에서 피비린네 나는 혈전을 벌인 결과 왜병들을 생포하거나 섬멸하므로 사도성을 완전히 탈환하는 대승의 전과를 거두었다.
294년(갑인년 유례 11) 여름 왜병(倭兵)들이 장봉성(長峰城)을 공격해 왔으나 신라군의 완벽한 방어와 퇴격전에 맞서 이기지 못하고 처량하게 도망치듯 물러갔다. 서기295년(을묘년 왕12년) 봄에 왕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왜인들이 빈번히 우리나라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없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백제와 연합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 가서 아주 그 나라를 격멸시키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어떠할까?"하니 서불한(舒佛邯) 홍권(弘權)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치 못한데 모험적인 원정을 하면 헤아리지 못할 위험한 일이 생길는지 염려되오며, 황차(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욕심을 가졌으므로 또한 그들과 연합하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위험한 일인 줄로 생각되나이다"하자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시고는 왜국 정벌을 그만 두었다.
서기297년(유례 14)에는 이서고국(伊西古國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이 금성(金城 : 지금의 경주)을 쳐들어오자 신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아도 물리치지 못고 곤욕을 치루었다. 이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나타났는데 그 수효는 셀 수 없고 모두 귀에 댓잎(竹葉)을 꽂고 신라군과 함께 적을 쳐 깨뜨렸다. 그 뒤 그들이 누구인지? 어느나라 군사인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간 곳 조차 알지 못하던 중, 누가 와서 말하기를 "미추왕릉에 댓잎이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모두가 그 곳으로 가보니 전에 없던 댓잎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댓잎은 이름 모를 응원군들이 귀에 꽂았던 댓잎과 같은 것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미추왕이 죽어서 비밀스러운 죽엽군사(竹葉軍士)로 도와준 것이라고 알게 되면서 선왕의 음덕을 깨달아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만이 아니라 '삼국유사'에도'미추왕죽엽군(未鄒王竹葉軍)'조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는 적국의 명칭이 이서국(伊西國)으로 되어 있다.
석유례왕께서는 서기298년(무오년 유례 15) 10월에 돌아 가셨다. 후계자는 동생인 이찬(伊飡) 걸숙(乞淑)의 아들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왕위를 이었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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