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특별기고] `경주 충의사`는 건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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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풍회장·교육학박사 김영호 작성일21-06-14 19:56본문
↑↑ 정풍회장·교육학박사 김영호지난 6월 9일 경주 임란창의공원에 소재하는 임란추모탑 앞에서 의사를 추모하는 분향과 헌화를 하였다. 경주, 울산 등 각처에서 의사들의 후손이 참예하였다. 특히 이날은 솔정병(率精兵) 300여인 손엽(孫曄)이 문천에 모여 백천간두에 처한 나라의 명운과 향토를 지키기 위하여 결사항쟁을 다짐한 문천회맹을 한 뜻깊은 날이었다.
백수청 경주임란의사추모회장의 위선지심(爲先之心)과 성력으로 경주시의 지원을 받아 해마다 의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시행해 오고 있으나, 헌화와 분향만으로 추모식을 마치는 것이 임란을 당하여 장렬하게 목숨 바친 의사들의 고귀한 보국충절에 대한 보답의 예의로서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은 느낌이다.
이웃 도시 울산에서는 충의사를 규모 있게 건립하여 임란에 창의 순절한 공신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성대하게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근년에 볼일 있어 울산의 충의사를 견학하였는데, 경주 출신 임란의사들의 위패가 봉안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주의 의사들이 울산에 침입한 왜적을 격살하기 위하여 참전했기 때문에 보답적 차원에서 봉안해준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울산시에 고마움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마치 남의 집에 세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울산광역시는 경주시에 비해 건립재원 마련이 용이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그것은 돈 보다도 조선(祖先)의 위대한 우국충정을 숭모하는 정신이 먼저 투철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1592년 4월 13일에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20여만 명의 왜군이 9진으로 편성하여 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진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절령도에 사냥 나갔던 부산첨사 정발은 창졸간에 당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절대충절을 살해한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밀양을 거쳐 5월 2일 서울에 입성하였고,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진 2만 2천여 대병은 언양을 거쳐 4월 21일에 경주에 입성하여 노곡에서 김 호 장군이 지휘하는 의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으나 경주성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적의 수급을 배었던 김호장군은 전공으로 부산첨절제사의 교지를 받았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애석하게도 마침내 순절하고 말았다.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올라온 왜군을 관군의 힘으로는 태부족하여, 경주를 비롯한 울산, 영천, 장기, 흥해, 동래, 등지의 장정 들은 솔선하여 창의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나라와 향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경주진관하 12고을 의병장들이 반월성 문천가에 모여 필사항전을 서약하는 문천회맹을 맺고 분연히 전장에 앞장서서 의병을 이끌었다. 그래서 그해 7월에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창암전투에서 운암 최봉천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9월에 경주성을 되찾기 위해 서천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때 경주인 이장손이 발명한 신무기 비격진천뢰가 우수한 화력을 발휘하여 많은 왜군이 살상되고 잔적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다.
드디어 9월 8일에 경주성은 되찾게 되었다. 수많은 의병이 가슴 아픈 순절하였으니, 그 거룩한 희생 어찌 영세불망의 충의가 아니리오.
우리 경주는 임란만이 아니라 신라의 삼국통일전쟁, 고려조의 병자호란, 조선조의 정유재란. 이시애란, 독립운동, 6·25동란 등과 같은 내외국란에 구국위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충의열사가 많이 거명된다. 이런 선현의 자발적·희생적 결단이 없었다면 3천리 강토는 타방(他邦)이 되어 서러운 피지배민족으로 노예적 생을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늦었지만 독립기념관과 같은 규모의 '경주충의사(慶州忠義祠)'를 긍구하여 충신열사의 혼령을 제대로 모실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행로에 무임승차할 수 없는 후생(後生)으로서의 마땅한 최소의 도리라 여겨진다.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헌성금을 모으고 국가적 지원을 보태어서 의미 깊은 경주충의사의 현판이 하루 빨리 게판(揭板)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정풍회장·교육학박사 김영호 kua348@naver.com
백수청 경주임란의사추모회장의 위선지심(爲先之心)과 성력으로 경주시의 지원을 받아 해마다 의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시행해 오고 있으나, 헌화와 분향만으로 추모식을 마치는 것이 임란을 당하여 장렬하게 목숨 바친 의사들의 고귀한 보국충절에 대한 보답의 예의로서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은 느낌이다.
이웃 도시 울산에서는 충의사를 규모 있게 건립하여 임란에 창의 순절한 공신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성대하게 추모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근년에 볼일 있어 울산의 충의사를 견학하였는데, 경주 출신 임란의사들의 위패가 봉안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주의 의사들이 울산에 침입한 왜적을 격살하기 위하여 참전했기 때문에 보답적 차원에서 봉안해준 것으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울산시에 고마움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마치 남의 집에 세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울산광역시는 경주시에 비해 건립재원 마련이 용이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그것은 돈 보다도 조선(祖先)의 위대한 우국충정을 숭모하는 정신이 먼저 투철했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1592년 4월 13일에 부산 앞바다에 상륙한 20여만 명의 왜군이 9진으로 편성하여 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진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절령도에 사냥 나갔던 부산첨사 정발은 창졸간에 당하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절대충절을 살해한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밀양을 거쳐 5월 2일 서울에 입성하였고,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진 2만 2천여 대병은 언양을 거쳐 4월 21일에 경주에 입성하여 노곡에서 김 호 장군이 지휘하는 의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으나 경주성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적의 수급을 배었던 김호장군은 전공으로 부산첨절제사의 교지를 받았으나 잔적을 소탕하다가 애석하게도 마침내 순절하고 말았다.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올라온 왜군을 관군의 힘으로는 태부족하여, 경주를 비롯한 울산, 영천, 장기, 흥해, 동래, 등지의 장정 들은 솔선하여 창의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오직 나라와 향토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경주진관하 12고을 의병장들이 반월성 문천가에 모여 필사항전을 서약하는 문천회맹을 맺고 분연히 전장에 앞장서서 의병을 이끌었다. 그래서 그해 7월에 영천성을 탈환하였다.
창암전투에서 운암 최봉천 장군을 비롯하여 많은 의병이 전사하였다. 9월에 경주성을 되찾기 위해 서천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이 때 경주인 이장손이 발명한 신무기 비격진천뢰가 우수한 화력을 발휘하여 많은 왜군이 살상되고 잔적은 혼비백산 달아나고 말았다.
드디어 9월 8일에 경주성은 되찾게 되었다. 수많은 의병이 가슴 아픈 순절하였으니, 그 거룩한 희생 어찌 영세불망의 충의가 아니리오.
우리 경주는 임란만이 아니라 신라의 삼국통일전쟁, 고려조의 병자호란, 조선조의 정유재란. 이시애란, 독립운동, 6·25동란 등과 같은 내외국란에 구국위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충의열사가 많이 거명된다. 이런 선현의 자발적·희생적 결단이 없었다면 3천리 강토는 타방(他邦)이 되어 서러운 피지배민족으로 노예적 생을 비참하게 살았을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늦었지만 독립기념관과 같은 규모의 '경주충의사(慶州忠義祠)'를 긍구하여 충신열사의 혼령을 제대로 모실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행로에 무임승차할 수 없는 후생(後生)으로서의 마땅한 최소의 도리라 여겨진다. 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헌성금을 모으고 국가적 지원을 보태어서 의미 깊은 경주충의사의 현판이 하루 빨리 게판(揭板)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정풍회장·교육학박사 김영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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