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진 단편연재소설] 나비의 새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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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서유진 작성일19-10-01 18:46본문
↑↑ 소설가 서유진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장 7절
유라는 10시쯤 카페를 나섰다.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가속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무언가를 짓뭉개면서 달려갔다. 그 무언가가 온갖 생명체로 변했다. 나비, 백조, 쥐, 고양이, 표범…. 차바퀴에 깔리는 물컹한 촉감을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중앙로를 벗어나면서 차량의 소통이 원활해졌다. 모텔의 지하주차장 후문 가까이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밤을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데서나 다리를 번쩍 쳐드는 버릇이 욕망의 징후가 아닌지. 하이힐을 내려다봤다. 명품 구두인데 코가 까졌다. 구두 굽으로 카펫을 꼭꼭 찍어 누르며 모텔의 복도를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남자가 여자를 부둥켜안고 다가왔다. 길을 틔워주며 마주 오는 여자를 얼핏 보았다. 선글라스로 은폐한 또 하나의 존재가 거기 있었다. 자신의 코에도 선글라스가 잘 걸려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얼른 선글라스를 올렸다. 바닥에 깔린 자줏빛 카펫이 폭신했다. 이 세상에는 카펫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둥지 속에 있는 여자도 많다. 자신을 여태 품어준 둥지는 무엇이었나? 돈? 장민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연인도 떠올랐다. 장민수는 어떤 인간일까. 나래차기를 한 그날, 미팅 약속을 하고부터 서슬 퍼렇던 유라의 적의가 엷어졌다.
'좀 늦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민수'
유라는 문자를 확인하고 모텔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권태로운 방이다. 킹사이즈 침대, 대형 거울, 소형 냉장고와 뚱뚱한 사람이 앉으면 발랑 뒤로 넘어질 듯 조그만 동그라미 탁자와 의자, 창문 양옆으로 나른하게 드리워진 진홍빛 커튼,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 남자들은 유라를 매력적이라 했다. 그런 말들이 위안이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돈 외는 필요한 게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카페 여자들이 그를 후줄근한 양복에 비유하면서도 왜 그에게 그처럼 몰려들까. 오늘 밤 자신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남루한 남자를 만나러 오다니, 그것도 두 배의 서비스료에 눈이 멀어서. 진이가 당한 실연의 책임을 묻고 이 남자를 한 방 먹이겠다는 의도는 사실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도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단 말인지…. 유라는 의기소침해졌다. 카페 생활도 벌써 십 년째였다. 한풀 꺾인 청춘이지만 자신의 매력은 외모를 뛰어넘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자부했다. 고객과 미팅이 잡히지 않은 날은 차분하게 책을 읽었고, 미팅하고 온 날은 걸신들린 듯 읽었다. 독서는 현실도피요, 안식처요, 꿈길이었다. 책장을 덮고 누워 있으면 책 속의 문장들이 일어나 가슴을 쓰다듬었다. 엄마 손길이 그런 느낌이었다. 파도에 휩쓸려간 엄마… 육체의 짐을 다 버린 영으로 떠다니다가 내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그 따스한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는 엄마…. 지금 시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종종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가 된 자신을 떠올렸다.
빌딩 사이로 파리한 십자가 불빛이 대기를 흔들며 떨고 있었다. 유라는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사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누구에게도 실연의 상처 따위 발설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금방 잊힐 꿈이다. 잃어버린 이십 대의 꿈과 사랑 대신 자신에게는 자립할 돈이 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프도록 가슴을 꼬집었다.
가방 안에서 안단테칸타빌레의 감상을 쓴 무명작가의 책을 꺼냈다. 루부탱 라이브 퍼포먼스에 나온 제니퍼 로페즈처럼 침대에 누워, 하이힐을 신은 채 두 발을 포개고 책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에서 '하프턴'은 섭리 같은 것이 아닌지요. 의지를 발휘할 때는 눈에서 강렬한 빛이 나오지요. 당신의 눈빛으로 나를 좀 일으켜주세요.
유라는 벌떡 일어났다. 언젠가 내 길도 하프턴 할 때가 있겠지.
건너 아그네스 빌딩의 네온 빛이 반짝거리며 뱅글뱅글 숨 가쁘게 돌고 있었다. 거기 클럽에는 얼굴이 앳된 소녀 스트리퍼가 있었다. 소녀는 끈 한 줄을 달랑 걸치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풋사과 같은 소녀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는 삶이라니, 유라는 목구멍으로 올라온 신물을 삼켰다. 그리스도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저 소녀에게도 그네의 사정이 있겠지. 유라는 두 손을 모았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요한복음 8장 7절
유라는 10시쯤 카페를 나섰다.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가속페달을 지그시 밟았다. 무언가를 짓뭉개면서 달려갔다. 그 무언가가 온갖 생명체로 변했다. 나비, 백조, 쥐, 고양이, 표범…. 차바퀴에 깔리는 물컹한 촉감을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중앙로를 벗어나면서 차량의 소통이 원활해졌다. 모텔의 지하주차장 후문 가까이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밤을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아무데서나 다리를 번쩍 쳐드는 버릇이 욕망의 징후가 아닌지. 하이힐을 내려다봤다. 명품 구두인데 코가 까졌다. 구두 굽으로 카펫을 꼭꼭 찍어 누르며 모텔의 복도를 걸어갔다. 맞은편에서 남자가 여자를 부둥켜안고 다가왔다. 길을 틔워주며 마주 오는 여자를 얼핏 보았다. 선글라스로 은폐한 또 하나의 존재가 거기 있었다. 자신의 코에도 선글라스가 잘 걸려있는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얼른 선글라스를 올렸다. 바닥에 깔린 자줏빛 카펫이 폭신했다. 이 세상에는 카펫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둥지 속에 있는 여자도 많다. 자신을 여태 품어준 둥지는 무엇이었나? 돈? 장민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과거의 연인도 떠올랐다. 장민수는 어떤 인간일까. 나래차기를 한 그날, 미팅 약속을 하고부터 서슬 퍼렇던 유라의 적의가 엷어졌다.
'좀 늦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민수'
유라는 문자를 확인하고 모텔 방으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권태로운 방이다. 킹사이즈 침대, 대형 거울, 소형 냉장고와 뚱뚱한 사람이 앉으면 발랑 뒤로 넘어질 듯 조그만 동그라미 탁자와 의자, 창문 양옆으로 나른하게 드리워진 진홍빛 커튼, 거울 속 여자의 실루엣…. 남자들은 유라를 매력적이라 했다. 그런 말들이 위안이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돈 외는 필요한 게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카페 여자들이 그를 후줄근한 양복에 비유하면서도 왜 그에게 그처럼 몰려들까. 오늘 밤 자신도 그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남루한 남자를 만나러 오다니, 그것도 두 배의 서비스료에 눈이 멀어서. 진이가 당한 실연의 책임을 묻고 이 남자를 한 방 먹이겠다는 의도는 사실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도 남자에 대한 환상이 있단 말인지…. 유라는 의기소침해졌다. 카페 생활도 벌써 십 년째였다. 한풀 꺾인 청춘이지만 자신의 매력은 외모를 뛰어넘는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자부했다. 고객과 미팅이 잡히지 않은 날은 차분하게 책을 읽었고, 미팅하고 온 날은 걸신들린 듯 읽었다. 독서는 현실도피요, 안식처요, 꿈길이었다. 책장을 덮고 누워 있으면 책 속의 문장들이 일어나 가슴을 쓰다듬었다. 엄마 손길이 그런 느낌이었다. 파도에 휩쓸려간 엄마… 육체의 짐을 다 버린 영으로 떠다니다가 내 머리맡을 지키고 앉아 그 따스한 손으로 나를 어루만지는 엄마…. 지금 시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면서, 종종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가 된 자신을 떠올렸다.
빌딩 사이로 파리한 십자가 불빛이 대기를 흔들며 떨고 있었다. 유라는 누군가에게 항의하고 싶었다. 사랑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누구에게도 실연의 상처 따위 발설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금방 잊힐 꿈이다. 잃어버린 이십 대의 꿈과 사랑 대신 자신에게는 자립할 돈이 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아프도록 가슴을 꼬집었다.
가방 안에서 안단테칸타빌레의 감상을 쓴 무명작가의 책을 꺼냈다. 루부탱 라이브 퍼포먼스에 나온 제니퍼 로페즈처럼 침대에 누워, 하이힐을 신은 채 두 발을 포개고 책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에서 '하프턴'은 섭리 같은 것이 아닌지요. 의지를 발휘할 때는 눈에서 강렬한 빛이 나오지요. 당신의 눈빛으로 나를 좀 일으켜주세요.
유라는 벌떡 일어났다. 언젠가 내 길도 하프턴 할 때가 있겠지.
건너 아그네스 빌딩의 네온 빛이 반짝거리며 뱅글뱅글 숨 가쁘게 돌고 있었다. 거기 클럽에는 얼굴이 앳된 소녀 스트리퍼가 있었다. 소녀는 끈 한 줄을 달랑 걸치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풋사과 같은 소녀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어울리는 삶이라니, 유라는 목구멍으로 올라온 신물을 삼켰다. 그리스도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저 소녀에게도 그네의 사정이 있겠지. 유라는 두 손을 모았다. <계속>
소설가 서유진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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