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옛 기억 속으로 천천히 번져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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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재 작성일19-09-29 18:53본문
[경북신문=장성재기자] ◆ 금 상 = 윤 순 옥
상주, 두 바퀴로 굴러가다
저녁을 먹고 실내에 가득한 열기를 피해 집을 나섰다. 바깥은 한결 시원했다. 식은 공기를 맞으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내리막길을 가고 있을 때 저 아래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걷는 내가 더 빨리 그 옆을 지나쳤다. 땀 냄새가 훅 끼쳤다.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흐르는 여름날, 자전거를 타는 그를 보자 옛 생각이 났다.
자전거의 도시 상주는 내 고향이다. 상주는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탄한 지형으로 쉽게 자전거를 탈수 있는 환경이다. 나에게 자전거 탈 기회가 온 것은 중학교 때였다. 버스도 다니지 않던 때라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왕복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꼭 필요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해는 언니가 3학년이었다. 일 년이 겹치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가 더 필요했다. 우리 형편에 새 것을 살 수는 없었고 아버지가 인근을 수소문해서 겨우 자전거 한 대를 구했다. 쇠붙이에는 녹이 슬었고 닳을 대로 닳은 자전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침마다 시골 동네가 왁자했다. 동네 언니 오빠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멀리 달아났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멋진 폼이 나는 그들과 달리 엉거주춤 모습도 우스웠다. 특히 여학생들은 더했다. 페달이 발에 닿지 않아 엉덩이를 흔들거려야했다. 나도 그랬다. 그 당시 내 키는 친구들 중 제일 작았다. 아무리 발가락을 세워 페달을 밟아도 엉덩이를 실룩거리지 않고 탈 방법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을 싫어했다. 고물 자전거는 만날 고장이었다. 하루는 줄이 벗겨지고 하루는 펑크가 났다. 펑크가 나는 날이면 수리 하는 곳까지 끌고 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줄이 벗겨지면 언니나 동네 오빠들의 도움을 받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횡재한 날이다. 뒤쳐져 혼자 가는 날이면 진땀을 뺐다. 큰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 한쪽 손으로 페달을 돌리고 다른 손으로 벗겨진 체인을 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그렇게 앉아 있는 날이면 울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아이가 부러웠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들이 지나갈까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는 힘든 것보다 부끄러움이 더한 시절이었다.
나는 고향 방문 때마다 짧은 시간이 아쉬웠다. 갓 결혼 했을 때 포항에서 상주를 가려면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가는 시간도 길었고 남편도 시간 내기 힘들었다. 더욱이 그즈음 작은 아들이 멀미를 심하게 했는데 많이 괴로워했다. 자연스럽게 친정 나들이가 줄어들었고 머무는 시간도 변함없이 짧았다. 마음으로 며칠이라도 머물 날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대하던 날이 왔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순조롭게 날짜가 맞춰졌다. 몇 해 전에는 포항 상주 간 고속도로가 뚫렸다. 시간이 단축되어 마음의 거리도 가깝게 느껴졌다. 기간은 칠월 첫째 토요일과 일요일을 낀 오일 간 이었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라 계획을 잡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혼자 떠나는 자유여행, 그것도 고향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떠올랐다. 자식과의 짧은 만남을 늘 꿈속 같다 하시던 어머니였다. 도착하자마자 갈 때를 묻던 어머니가 그날은 세월이 내려앉은 얼굴위로 소녀같이 환한 미소를 짓길 바랐다.
고향에는 갈 곳이 참 많다. 세어보니 손이 모자랐다. 어디부터 방문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상주는 곶감박물관, 상주박물관, 자전거박물관, 명주박물관, 국립생태자연관 등 박물관의 도시였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했다.
고민 끝에 처음 방문지를 자전거 박물관으로 정했다.'자전거 박물관'이라는 표지판이 생긴 것은 오래전이었다. 그때도 고향 가는 길에 보이지 않던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새로 들어선 자전거 박물관을 알리는 표시였다. 자전거로 유명한 고장에 자전거 박물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궁금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 길을 지나치기만 했다.
상주 시내로 들어섰다. 자동차 길안내를 따라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나무가 많았다. 숲처럼 우거져 차에서 내려 걷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운치가 있었다. 마치 오솔길을 연상하게 했고 길가 오래된 나무들이 초록 손길을 뻗어 반겨 주는 듯했다.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한산한 그 길에서 옛 길을 만났다. 그 길을 마음속에 그림 그리듯 그려 놓았다. 숲이 끝나는 길에 나지막한 건물이 나타났다. 자동차 길안내가 도착지점을 알렸다. 상주시 용마로 415, 드디어 자전거 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지하1층과 지상2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지하에는 관람객에게 자전거를 대여하는 대여소가 있고 1층에는 매표소, 기획전시실, 4D영상관이 있고 2층은 상설전시실과 체험 존이 있다. 나는 2층 상설전시관에 눈길이 갔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과정과 변화를 시대별로 정리해서 자전거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상주는 자전거 타기에 좋은 조건으로 일제강점기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는 수단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자전거가 보급되었다.
자전거로 유명한 상주에서 크고 작은 자전거 대회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1925년 상주역의 개청 기념으로 열린 '조선팔도 전국 자전거대회'에서 일제강점기 유명했던 엄복동 선수와 상주 출신 박상헌 선수가 일본선수들을 물리쳐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상주가 자전거 고장이 되는 출발이 되었다. 현재 상주에는 자전거 도시답게 사이클 선수가 많고 다수의 자전거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눈에 익은 자전거 한 대를 발견했다. 오래전 내가 탔던 자전거와 많이 닮았다. 그 자전거를 보고 있으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 어제처럼 다가왔다. 수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어도 추억은 남아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행 후, 고향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마음이 가서 그런가, 최근 상주시 관련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된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낙동강을 이용한 볼거리를 개발하고 농가에서는 특용작물과 새로운 과수 재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뉴스가 무척 반가웠다.
시대가 바뀌고 교통수단이 다양해졌지만 상주에는 여전히 자전거가 달린다. 옛 자전거에 전기장치를 달고 디자인을 바꾸었다. 연령에 맞는 맞춤식 자전거로 모습도 변했다. 그렇지만 모습과 기능이 바뀌었을 뿐 두 개의 바퀴, 핸들, 안장, 체인 등에는 변함이 없다. 기본 위에 변화가 덧대진 자전거처럼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나아가서는 미래에 우뚝 서는 상주가 되길 빌어본다.
◆ 금 상 = 김 재 순
복습의 유효기간
폭우가 쏟아졌다.
3년 후 그때도 비가 왔다. 대나무 살의 파란 비닐우산을 부여잡고 바람을 막으랴, 빗줄기를 피하랴, 그렇게 두 번의 수학여행은 실눈을 뜬 채 빗속을 질척질척 걸었었다.
이제 단출한 나이에 들어선 우리. 지난 시간을 하나씩 매만지다 수학여행 가자는 친구의 말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우리의 여행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됐다. 2박 3일. 오월의 끝자락에 서서 유월을 당기며, 내 등판보다 작은 배낭을 메고 얇은 잠바 하나면 족한 길을 나섰다. 서울 수서역에서 신경주역까지의 소요시간은 SRT로 2시간이다. 창밖의 연초록이 내내 생글생글 웃고 있다. 그에 반해 중년 여인들의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는 열차 안의 뭇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릴 작은 피해를 주며 경주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흔한 속담을 역시 명언이라 한 마디씩 거들며 사찰음식으로 몸을 정화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수학여행을 알차게 보내야지. 들뜬 마음은 일정을 촘촘하게 계획했다. 소화시킬 틈도 주지 않은 채 불룩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택시를 타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석굴암까지 오르막은 기억 속의 길보다 훨씬 넓었다. 평일 산길은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아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람쥐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무 위를 오르내린다. 서로를 기다려 주는 모습이 곰살맞다. 발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섶에서 빤히 바라보는 다람쥐가 오히려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때마침 나긋나긋한 햇살이 풍성한 나무 사이를 헤치며 실바람을 안고 내려왔다. 그 참에 잠시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무리 지어 산을 올랐다. 각지에서 온 또래들의 발길에 밀려 밀려서 습기 찬 유리문을 스쳐 지나쳤다. 석굴암은 교과서 속에서도 수학여행에서도 희뿌연 유리에 갇힌 바랜 사진으로 존재했다. 지금은 문화해설사가 메마른 교과서를 대신하고 있다. 매년 초파일에는 석굴암을 개방한다는 귀한 소식도 전해 들었다.
불국사로 달렸다. 어느 학교든 수학여행 사진을 보면 똑같고 배경 속 사람만 바뀐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우리도 수학여행 기분을 냈다. 사진 속 두 개의 다리가 청운교, 백운교가 아니었고, 왼쪽은 연하문 자하문을 통해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오른쪽은 청운교 백운교를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을 뵌다는 사실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내일의 경주 시티투어를 위해 수면을 방해할 차 한잔도 마다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투어는 신라역사 투어, 동해안 투어, 세계문화유산 투어. 양동마을 남산 투어, 야간 시티투어가 있다. 우리가 택한 코스는 동해안 투어였다. 몇십 년 미뤘던 충실한 복습을 위해 앞줄을 지키리라.
만파식적의 맑은 피리 소리를 쫓아 감은사지(感恩寺址)로 향했다. 감은사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절의 터만 남아있다. 감은사지는 경주시 양북면에 있으며 두 개의 3층 석탑이 남아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으나 절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 금당(金堂)의 바닥은 반듯한 네모 받침돌을 마룻널처럼 잇대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금당의 마루 밑 공간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
발길을 이어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내가 죽거든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인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 지내라,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 유언에 따라 불교 법식으로 화장한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그 후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 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안쪽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물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고 싶어 했던 문무왕.
넘실대는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한 문무대왕의 수증릉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보퉁이가 생각났다. 여름이 시작되면 주섬주섬 옷 보따리를 챙겼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아버지를 위해 작은아버지 집으로 여름을 나러 가기 위해서다. 방문 앞에 할머니의 보따리가 놓이면 엄마는 마당에 연탄난로를 꺼내 놓는다. 마당에서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마루를 지나 방으로 가져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손 많이 가고 힘들었을 일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한 사람의 열기라도 덜어내려던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보고 자란 탓이었으리라. 우리도 한여름엔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지금, 엄마를 통해 가끔 아버지의 고단했던 지난 얘길 듣는다. 열일곱 어린 나이의 아버지는 가을 추수 후 지붕에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삿 매기는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어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 품삯을 꼭 받는 큰아버지에게는 품삯 대신 땔 나무를 해줬단다. 큰아버지에게 아비 잃은 조카는 동생의 자식이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런 존재였나 보다. 아버지는 힘들었던 생활을 할머니가 알면 마음 아파할까 봐 돌아가실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의 부상으로 불편했던 아버지의 손. 아버진 할머니에게 평생 한으로 얼룩진 금쪽같은 자식이었다. 그렇게 애달파하던 아버지를 남기고 할머니는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우리는 할머니의 금쪽같은 아들을 위해 여전히 친정 나들이를 삼갔다. 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은 한 언덕이라 했던가.
오래전 신문에서 읽은 심경호 한문학과 교수의 '한자 이야기'가 생각났다.
'父母之年은 不可不知也니, 一則以喜요 一則以懼니라'
부모의 연세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해야 한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은 부모님의 長壽(장수)를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高齡(고령)이시라서 혹 餘生(여생)이 얼마 되지 않으실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한나라 揚雄(양웅)의 '法言(법언)'에 "어버이 섬기는 일은 언제까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효자는 날이 감을 애석해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연세든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곁에서 살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을 효도라고 생각하는 무지를 범했다. 부끄러움을 숨기듯 서둘러 골굴사로 향했다.
이름만큼이나 모습이 특이한 절이다. 경주 함월산에 위치한 골굴사는 신라 6세기경 서역에서 온 광유(光有) 성인 일행이 암반 전산에 마애여래불과 12처 6굴로 가람을 조성한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관음굴 법당에 올라 관세음보살님을 뵈며 이제와 염치없지만 우리 가족의 건강을 부탁드렸다. 골굴사에는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다 기운이 빠져 혼절했을 때 남편이 골굴사의 금강 약수를 떠서 산모에게 먹였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순산하였다는 신비한 전설이 전해진다. 금강 약수에 미련을 남겨 둔 채 다음 일정을 위해 길을 재촉했다.
마지막 유적지인 원성 대왕릉. 원성왕릉은 유해를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여 괘릉(掛陵)이라고도 한다. 괘릉의 능묘 조각 중 칼을 움켜쥐고 주먹을 쥔 무인상은 큼직한 이목구비, 힘이 느껴지는 굵은 옷 주름, 근육이나 장식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는데 곱슬머리와 부릅뜬 눈, 턱수염 등은 서역인의 모습이 보였다. 서역인의 풍모를 한 무인상에서 동서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40여 년 만에 들른 경주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잘 아는 옆집 같은 친근함이 일었다. 그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연유로 이리 친한 척하는 걸까? 선사시대부터 많은 유적을 남긴 천년 신라. 아마 수학여행지임이 한몫을 한 듯하다. 반면 또 다른 주마간산의 아쉬움이 인다. 허나 그게 무슨 대수랴. 이미 '씨티투어'라는 고급 정보를 알았으니 2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는 그리 문제 되지 않았다. 너나들이하는 이제 하나씩 알아가면 될 테니까. 다음 방문에는 수학과 여행 둘 다 잡으리라는 알찬 계획을 구상하며 신경주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토박이 단팥빵을 맛보며 마냥 좋았던 나의 10대에게 손을 흔들었다. 달달한 경주가 폭 안긴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상주, 두 바퀴로 굴러가다
저녁을 먹고 실내에 가득한 열기를 피해 집을 나섰다. 바깥은 한결 시원했다. 식은 공기를 맞으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내리막길을 가고 있을 때 저 아래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걷는 내가 더 빨리 그 옆을 지나쳤다. 땀 냄새가 훅 끼쳤다.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흐르는 여름날, 자전거를 타는 그를 보자 옛 생각이 났다.
자전거의 도시 상주는 내 고향이다. 상주는 오르막 내리막이 없는 평탄한 지형으로 쉽게 자전거를 탈수 있는 환경이다. 나에게 자전거 탈 기회가 온 것은 중학교 때였다. 버스도 다니지 않던 때라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왕복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중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자전거가 꼭 필요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는 해는 언니가 3학년이었다. 일 년이 겹치기 때문에 자전거 한 대가 더 필요했다. 우리 형편에 새 것을 살 수는 없었고 아버지가 인근을 수소문해서 겨우 자전거 한 대를 구했다. 쇠붙이에는 녹이 슬었고 닳을 대로 닳은 자전거였다.
어쩔 수 없이 그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침마다 시골 동네가 왁자했다. 동네 언니 오빠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멀리 달아났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생이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멋진 폼이 나는 그들과 달리 엉거주춤 모습도 우스웠다. 특히 여학생들은 더했다. 페달이 발에 닿지 않아 엉덩이를 흔들거려야했다. 나도 그랬다. 그 당시 내 키는 친구들 중 제일 작았다. 아무리 발가락을 세워 페달을 밟아도 엉덩이를 실룩거리지 않고 탈 방법이 없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을 싫어했다. 고물 자전거는 만날 고장이었다. 하루는 줄이 벗겨지고 하루는 펑크가 났다. 펑크가 나는 날이면 수리 하는 곳까지 끌고 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줄이 벗겨지면 언니나 동네 오빠들의 도움을 받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횡재한 날이다. 뒤쳐져 혼자 가는 날이면 진땀을 뺐다. 큰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 한쪽 손으로 페달을 돌리고 다른 손으로 벗겨진 체인을 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그렇게 앉아 있는 날이면 울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고 내 옆을 쏜살같이 지나가는 아이가 부러웠다. 그러다가 아는 친구들이 지나갈까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때는 힘든 것보다 부끄러움이 더한 시절이었다.
나는 고향 방문 때마다 짧은 시간이 아쉬웠다. 갓 결혼 했을 때 포항에서 상주를 가려면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가는 시간도 길었고 남편도 시간 내기 힘들었다. 더욱이 그즈음 작은 아들이 멀미를 심하게 했는데 많이 괴로워했다. 자연스럽게 친정 나들이가 줄어들었고 머무는 시간도 변함없이 짧았다. 마음으로 며칠이라도 머물 날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고대하던 날이 왔다.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순조롭게 날짜가 맞춰졌다. 몇 해 전에는 포항 상주 간 고속도로가 뚫렸다. 시간이 단축되어 마음의 거리도 가깝게 느껴졌다. 기간은 칠월 첫째 토요일과 일요일을 낀 오일 간 이었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라 계획을 잡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혼자 떠나는 자유여행, 그것도 고향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보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먼저 떠올랐다. 자식과의 짧은 만남을 늘 꿈속 같다 하시던 어머니였다. 도착하자마자 갈 때를 묻던 어머니가 그날은 세월이 내려앉은 얼굴위로 소녀같이 환한 미소를 짓길 바랐다.
고향에는 갈 곳이 참 많다. 세어보니 손이 모자랐다. 어디부터 방문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상주는 곶감박물관, 상주박물관, 자전거박물관, 명주박물관, 국립생태자연관 등 박물관의 도시였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에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했다.
고민 끝에 처음 방문지를 자전거 박물관으로 정했다.'자전거 박물관'이라는 표지판이 생긴 것은 오래전이었다. 그때도 고향 가는 길에 보이지 않던 이정표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새로 들어선 자전거 박물관을 알리는 표시였다. 자전거로 유명한 고장에 자전거 박물관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궁금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 길을 지나치기만 했다.
상주 시내로 들어섰다. 자동차 길안내를 따라 박물관으로 가는 길에는 나무가 많았다. 숲처럼 우거져 차에서 내려 걷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운치가 있었다. 마치 오솔길을 연상하게 했고 길가 오래된 나무들이 초록 손길을 뻗어 반겨 주는 듯했다.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한산한 그 길에서 옛 길을 만났다. 그 길을 마음속에 그림 그리듯 그려 놓았다. 숲이 끝나는 길에 나지막한 건물이 나타났다. 자동차 길안내가 도착지점을 알렸다. 상주시 용마로 415, 드디어 자전거 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지하1층과 지상2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지하에는 관람객에게 자전거를 대여하는 대여소가 있고 1층에는 매표소, 기획전시실, 4D영상관이 있고 2층은 상설전시실과 체험 존이 있다. 나는 2층 상설전시관에 눈길이 갔다.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들어온 과정과 변화를 시대별로 정리해서 자전거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상주는 자전거 타기에 좋은 조건으로 일제강점기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는 수단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자전거가 보급되었다.
자전거로 유명한 상주에서 크고 작은 자전거 대회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1925년 상주역의 개청 기념으로 열린 '조선팔도 전국 자전거대회'에서 일제강점기 유명했던 엄복동 선수와 상주 출신 박상헌 선수가 일본선수들을 물리쳐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상주가 자전거 고장이 되는 출발이 되었다. 현재 상주에는 자전거 도시답게 사이클 선수가 많고 다수의 자전거 동호회가 활동하고 있다.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눈에 익은 자전거 한 대를 발견했다. 오래전 내가 탔던 자전거와 많이 닮았다. 그 자전거를 보고 있으니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 어제처럼 다가왔다. 수십 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어도 추억은 남아 그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행 후, 고향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마음이 가서 그런가, 최근 상주시 관련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된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과 낙동강을 이용한 볼거리를 개발하고 농가에서는 특용작물과 새로운 과수 재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뉴스가 무척 반가웠다.
시대가 바뀌고 교통수단이 다양해졌지만 상주에는 여전히 자전거가 달린다. 옛 자전거에 전기장치를 달고 디자인을 바꾸었다. 연령에 맞는 맞춤식 자전거로 모습도 변했다. 그렇지만 모습과 기능이 바뀌었을 뿐 두 개의 바퀴, 핸들, 안장, 체인 등에는 변함이 없다. 기본 위에 변화가 덧대진 자전거처럼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나아가서는 미래에 우뚝 서는 상주가 되길 빌어본다.
◆ 금 상 = 김 재 순
복습의 유효기간
폭우가 쏟아졌다.
3년 후 그때도 비가 왔다. 대나무 살의 파란 비닐우산을 부여잡고 바람을 막으랴, 빗줄기를 피하랴, 그렇게 두 번의 수학여행은 실눈을 뜬 채 빗속을 질척질척 걸었었다.
이제 단출한 나이에 들어선 우리. 지난 시간을 하나씩 매만지다 수학여행 가자는 친구의 말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우리의 여행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됐다. 2박 3일. 오월의 끝자락에 서서 유월을 당기며, 내 등판보다 작은 배낭을 메고 얇은 잠바 하나면 족한 길을 나섰다. 서울 수서역에서 신경주역까지의 소요시간은 SRT로 2시간이다. 창밖의 연초록이 내내 생글생글 웃고 있다. 그에 반해 중년 여인들의 거리낌 없는 웃음소리는 열차 안의 뭇사람들에게 눈살 찌푸릴 작은 피해를 주며 경주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흔한 속담을 역시 명언이라 한 마디씩 거들며 사찰음식으로 몸을 정화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수학여행을 알차게 보내야지. 들뜬 마음은 일정을 촘촘하게 계획했다. 소화시킬 틈도 주지 않은 채 불룩 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택시를 타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석굴암까지 오르막은 기억 속의 길보다 훨씬 넓었다. 평일 산길은 방문객도 그리 많지 않아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람쥐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무 위를 오르내린다. 서로를 기다려 주는 모습이 곰살맞다. 발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섶에서 빤히 바라보는 다람쥐가 오히려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때마침 나긋나긋한 햇살이 풍성한 나무 사이를 헤치며 실바람을 안고 내려왔다. 그 참에 잠시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무리 지어 산을 올랐다. 각지에서 온 또래들의 발길에 밀려 밀려서 습기 찬 유리문을 스쳐 지나쳤다. 석굴암은 교과서 속에서도 수학여행에서도 희뿌연 유리에 갇힌 바랜 사진으로 존재했다. 지금은 문화해설사가 메마른 교과서를 대신하고 있다. 매년 초파일에는 석굴암을 개방한다는 귀한 소식도 전해 들었다.
불국사로 달렸다. 어느 학교든 수학여행 사진을 보면 똑같고 배경 속 사람만 바뀐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우리도 수학여행 기분을 냈다. 사진 속 두 개의 다리가 청운교, 백운교가 아니었고, 왼쪽은 연하문 자하문을 통해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오른쪽은 청운교 백운교를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을 뵌다는 사실을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새롭게 알 수 있었다.
내일의 경주 시티투어를 위해 수면을 방해할 차 한잔도 마다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투어는 신라역사 투어, 동해안 투어, 세계문화유산 투어. 양동마을 남산 투어, 야간 시티투어가 있다. 우리가 택한 코스는 동해안 투어였다. 몇십 년 미뤘던 충실한 복습을 위해 앞줄을 지키리라.
만파식적의 맑은 피리 소리를 쫓아 감은사지(感恩寺址)로 향했다. 감은사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절의 터만 남아있다. 감은사지는 경주시 양북면에 있으며 두 개의 3층 석탑이 남아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으나 절의 완공을 보지 못했다.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감은사 금당(金堂)의 바닥은 반듯한 네모 받침돌을 마룻널처럼 잇대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금당의 마루 밑 공간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
발길을 이어 문무대왕릉으로 향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의 "내가 죽거든 왜구가 들어오는 길목인 동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 지내라,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 유언에 따라 불교 법식으로 화장한 유골을 동해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그 후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 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안쪽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물이 되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고 싶어 했던 문무왕.
넘실대는 바닷물에 몸을 맡긴 채,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한 문무대왕의 수증릉을 바라보며 할머니의 보퉁이가 생각났다. 여름이 시작되면 주섬주섬 옷 보따리를 챙겼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아버지를 위해 작은아버지 집으로 여름을 나러 가기 위해서다. 방문 앞에 할머니의 보따리가 놓이면 엄마는 마당에 연탄난로를 꺼내 놓는다. 마당에서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 마루를 지나 방으로 가져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손 많이 가고 힘들었을 일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한 사람의 열기라도 덜어내려던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보고 자란 탓이었으리라. 우리도 한여름엔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지금, 엄마를 통해 가끔 아버지의 고단했던 지난 얘길 듣는다. 열일곱 어린 나이의 아버지는 가을 추수 후 지붕에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올렸다. 하지만 고삿 매기는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어 큰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하루 품삯을 꼭 받는 큰아버지에게는 품삯 대신 땔 나무를 해줬단다. 큰아버지에게 아비 잃은 조카는 동생의 자식이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런 존재였나 보다. 아버지는 힘들었던 생활을 할머니가 알면 마음 아파할까 봐 돌아가실 때까지 말하지 않았다. 6·25 전쟁 중의 부상으로 불편했던 아버지의 손. 아버진 할머니에게 평생 한으로 얼룩진 금쪽같은 자식이었다. 그렇게 애달파하던 아버지를 남기고 할머니는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우리는 할머니의 금쪽같은 아들을 위해 여전히 친정 나들이를 삼갔다. 하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은 한 언덕이라 했던가.
오래전 신문에서 읽은 심경호 한문학과 교수의 '한자 이야기'가 생각났다.
'父母之年은 不可不知也니, 一則以喜요 一則以懼니라'
부모의 연세는 알지 않으면 안 되니, 한편으로는 기뻐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해야 한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은 부모님의 長壽(장수)를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高齡(고령)이시라서 혹 餘生(여생)이 얼마 되지 않으실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한나라 揚雄(양웅)의 '法言(법언)'에 "어버이 섬기는 일은 언제까지고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효자는 날이 감을 애석해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연세든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곁에서 살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는 것을 효도라고 생각하는 무지를 범했다. 부끄러움을 숨기듯 서둘러 골굴사로 향했다.
이름만큼이나 모습이 특이한 절이다. 경주 함월산에 위치한 골굴사는 신라 6세기경 서역에서 온 광유(光有) 성인 일행이 암반 전산에 마애여래불과 12처 6굴로 가람을 조성한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관음굴 법당에 올라 관세음보살님을 뵈며 이제와 염치없지만 우리 가족의 건강을 부탁드렸다. 골굴사에는 산모가 아기를 출산하다 기운이 빠져 혼절했을 때 남편이 골굴사의 금강 약수를 떠서 산모에게 먹였더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순산하였다는 신비한 전설이 전해진다. 금강 약수에 미련을 남겨 둔 채 다음 일정을 위해 길을 재촉했다.
마지막 유적지인 원성 대왕릉. 원성왕릉은 유해를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여 괘릉(掛陵)이라고도 한다. 괘릉의 능묘 조각 중 칼을 움켜쥐고 주먹을 쥔 무인상은 큼직한 이목구비, 힘이 느껴지는 굵은 옷 주름, 근육이나 장식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는데 곱슬머리와 부릅뜬 눈, 턱수염 등은 서역인의 모습이 보였다. 서역인의 풍모를 한 무인상에서 동서문화 교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40여 년 만에 들른 경주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잘 아는 옆집 같은 친근함이 일었다. 그 옆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연유로 이리 친한 척하는 걸까? 선사시대부터 많은 유적을 남긴 천년 신라. 아마 수학여행지임이 한몫을 한 듯하다. 반면 또 다른 주마간산의 아쉬움이 인다. 허나 그게 무슨 대수랴. 이미 '씨티투어'라는 고급 정보를 알았으니 2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는 그리 문제 되지 않았다. 너나들이하는 이제 하나씩 알아가면 될 테니까. 다음 방문에는 수학과 여행 둘 다 잡으리라는 알찬 계획을 구상하며 신경주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토박이 단팥빵을 맛보며 마냥 좋았던 나의 10대에게 손을 흔들었다. 달달한 경주가 폭 안긴다.
장성재 blowpa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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