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걸 역사이야기] 통치술과 직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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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작성일19-09-23 17:34본문
↑↑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이준걸1517년 강원도에 큰 눈이 내려 보리가 얼어 죽자 특진관 이자건이 중종임금 면전에서 "성심이 지극하지 못 하여 재난을 입었다"고 하였다. 자연 재해까지도 임금의 실덕에서 그렇다고 직언하였다. 그리고 대사헌 조광조(동방4현의 한사람)는 중종에게 맞대어 "어진 임금은 대간(사헌부 · 사간원 관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옳지 않은 임금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대간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지금 대간들이 간절히 논계하고 사직하는 것은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상을 주고 감복할 일을 전하는 위엄으로 물리치고 사기를 꺾어 버리니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전하의 성덕과 학문으로 이 지경에 이르실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라고 사정없이 직언했다.
중종은 그럼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조광조는 "군자와 소인을 가려서 쓰면 됩니다"라고 하니 임금은 "구별할 수가 없다"고 해, 조광조는 "군자는 겸손하여 스스로 숨어 살고자 하기에 찾아보기 어렵고, 소인은 아는 척 싸다니기 때문에 잘 보인다"고 하였다. 과연 인사가 만사라 인재등용이 정치의 승패를 가름하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간 큰 남자 임숙영은 1611년 과거시험에 '나라에서 가장 화급한 사안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무(時務)가 출제되었다. 그는 서슴없이 '정신 못 차리는 임금이 가장 화급한 문제'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 임금의 실수는 국가의 병입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신중한 마음을 가지십시요' 그것도 바로 절대 군주인 광해군 앞에서 치른 시험에서 내놓은 답이었다.
이 때 다수의 감독관이 광해군이 두려워 낙방을 시키려 했으나 심희수라는 감독관이 고집해 급제시킬 것을 주장해 합격하고,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옳곧은 시무에 유소문(儒疏文)은 대부분 그가 맡아 썼다. 신하들의 주장으로 구제된 임숙영은 관리로서 소신을 십분 발휘하고, 직언에 숨어있는 내면세계 즉 민초들의 생각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요즘도 이런 공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들어 내놓고 업무를 처리하다간 어느 귀신이 잡아가지는 않더라도 백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다.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 학자로 상소문에 '대비(문정왕후·중종의 비)는 성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으슥한 구중궁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무능한 왕권을 대놓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퇴계는 이를 두고 고항지사(高抗之士)라고 높이 평가 하였다.
조식은 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고, 단성현감에 피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가 벼슬에 나오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상서원 판관을 받아 명종을 뵙고 '정치의 도리와 방법'을 표로 적어 올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두류산에 '산천재'란 당호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렇게 임금을 대놓고 '정신 못 차린 경솔한 통치자'라고 극언을 내뱉었는데도 관리로 등용코자 여러차례 시도한 그 너그러운 이해와 감싸주는 포용성에 지금의 인사 관리 정책과 비교해 보면 용인술(用人術)이 얼마나 속 좁은 우물 안 개구리로 후퇴했는지 알 수 있다.
당나라 현종 때 재상 한유는 매우 강직해 현종의 잘못을 면전에서 서슴없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를 보다 못한 측근이 "왜 한유를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현종은 "한유 때문에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고, 항상 잠도 편히 자지 못 해 이렇게 말랐지만, 그 대신 나라가 살쪄 천하가 편하지 않았는가"라고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과연 현군 밑에 충신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측근을 멀리하고 아부를 극히 경계하며 듣기 거북한 직언일수록 깊은 반추로 그 고언을 음미 해 보는 현종 같은 위정자와 나라가 잘 되라고 임금 앞에 막말하는 한유 같은 재상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은 바란다.
늘품수 없이 꽉 막혀 내 사람만 챙기는 소심한 도량의 지도자로서는 국가 경쟁사회에 나라의 품격은 급전직하로 내려앉게 마련이다.
한 국가의 품격은 사회구성원 전체가 만들어가는 꽃이며 향기다. 품격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의 언행은 그 나라의 품격 즉 국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체나 신분에 알맞은 언사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이며 미덕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부당한 판단이나 명령 및 행동을 실록에 가차 없이 기록하며 꾸짖는 사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맞서 싸운 당시 관리들의 기개의 참모습이 정말 그립다. <끝>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중종은 그럼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조광조는 "군자와 소인을 가려서 쓰면 됩니다"라고 하니 임금은 "구별할 수가 없다"고 해, 조광조는 "군자는 겸손하여 스스로 숨어 살고자 하기에 찾아보기 어렵고, 소인은 아는 척 싸다니기 때문에 잘 보인다"고 하였다. 과연 인사가 만사라 인재등용이 정치의 승패를 가름하는 요체가 된다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간 큰 남자 임숙영은 1611년 과거시험에 '나라에서 가장 화급한 사안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는 시무(時務)가 출제되었다. 그는 서슴없이 '정신 못 차리는 임금이 가장 화급한 문제'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실수와 허물에 대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 임금의 실수는 국가의 병입니다. 자만심을 버리고 신중한 마음을 가지십시요' 그것도 바로 절대 군주인 광해군 앞에서 치른 시험에서 내놓은 답이었다.
이 때 다수의 감독관이 광해군이 두려워 낙방을 시키려 했으나 심희수라는 감독관이 고집해 급제시킬 것을 주장해 합격하고,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성격이 강직하여 옳곧은 시무에 유소문(儒疏文)은 대부분 그가 맡아 썼다. 신하들의 주장으로 구제된 임숙영은 관리로서 소신을 십분 발휘하고, 직언에 숨어있는 내면세계 즉 민초들의 생각을 유감없이 표출했다. 요즘도 이런 공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들어 내놓고 업무를 처리하다간 어느 귀신이 잡아가지는 않더라도 백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다.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 학자로 상소문에 '대비(문정왕후·중종의 비)는 성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으슥한 구중궁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명종)는 아직 어리니 고아일 뿐입니다'라고 무능한 왕권을 대놓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퇴계는 이를 두고 고항지사(高抗之士)라고 높이 평가 하였다.
조식은 회재 이언적의 천거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불응하고, 단성현감에 피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퇴계가 벼슬에 나오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상서원 판관을 받아 명종을 뵙고 '정치의 도리와 방법'을 표로 적어 올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도 계속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두류산에 '산천재'란 당호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렇게 임금을 대놓고 '정신 못 차린 경솔한 통치자'라고 극언을 내뱉었는데도 관리로 등용코자 여러차례 시도한 그 너그러운 이해와 감싸주는 포용성에 지금의 인사 관리 정책과 비교해 보면 용인술(用人術)이 얼마나 속 좁은 우물 안 개구리로 후퇴했는지 알 수 있다.
당나라 현종 때 재상 한유는 매우 강직해 현종의 잘못을 면전에서 서슴없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를 보다 못한 측근이 "왜 한유를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현종은 "한유 때문에 하루도 즐거운 날이 없고, 항상 잠도 편히 자지 못 해 이렇게 말랐지만, 그 대신 나라가 살쪄 천하가 편하지 않았는가"라고 거부의사를 피력했다.
과연 현군 밑에 충신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측근을 멀리하고 아부를 극히 경계하며 듣기 거북한 직언일수록 깊은 반추로 그 고언을 음미 해 보는 현종 같은 위정자와 나라가 잘 되라고 임금 앞에 막말하는 한유 같은 재상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은 바란다.
늘품수 없이 꽉 막혀 내 사람만 챙기는 소심한 도량의 지도자로서는 국가 경쟁사회에 나라의 품격은 급전직하로 내려앉게 마련이다.
한 국가의 품격은 사회구성원 전체가 만들어가는 꽃이며 향기다. 품격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의 언행은 그 나라의 품격 즉 국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체나 신분에 알맞은 언사로 체면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이며 미덕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부당한 판단이나 명령 및 행동을 실록에 가차 없이 기록하며 꾸짖는 사관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맞서 싸운 당시 관리들의 기개의 참모습이 정말 그립다. <끝>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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