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걸 역사이야기] 통치술과 직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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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작성일19-09-19 19:56본문
↑↑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이준걸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상(武)에서 천하를 잡았으나 문(文)에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열두 아들과 학자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 문고(도서관)을 설치하고 출판사업의 장려와 학문을 증진시켜 그 통치술을 학자로부터 얻고자 적격자를 물색하였다. 초려삼고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가를 여러 번 만나 정치 고문으로 협조를 부탁했으나 그는 학문에만 증진한다며 끝내 사양하고 하야시 라산을 천거 받아 중신으로 삼았다.
도쿠가와는 측근을 물리치고 후지와라의 문인인 기노시타 데이강이 길러낸 이른바 '기노몽(木門) 5선생과 10철(哲)'이 등용되어 도쿠가와 치하의 문권, 교권,정권에 관여하여 소신 끝 역량을 펼쳐 나라의 안정과 문예부흥을 일으켜 그 유업이 15대장군 256년간 한국과 가장 좋은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도쿠가와의 진면목의 진수는 "중신 간부가 자신과 마음이 맞는 부리기 쉬운 사람만을 중시하면 진정 인재는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측근을 멀리하고 정말로 인재는 없는가 하고 보물을 찾는 의욕으로 넓고 깊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정치 덕목의 첫째를 용인(用人·인사관리)에 두고, 다음에 이재(利財·경제정책)에 치중하여 통치 치적에 승부를 걸었다. 이 두 가지도 오로지 학문에서 유래한다고 굳게 믿었다. 사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낸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동물로 남아 있는 한 변함없는 진리임을 굳게 신봉한 듯 도서관에서의 출판 사업에 전력투구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에 '아즈마가가미(吾妻鏡)'라는 책이 있는데 주제는 나의 잘잘못은 곧 아내의 얼굴에서 나타나므로, 아내를 살펴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통치자의 공과는 백성들이 쓴 글속에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이 책을 펼쳐보고 각별히 백성들의 여론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나는 거울로 의관을 보고, 역사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고,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통치술을 비추어 본다"는 세 가지 거울인 삼경자조(三鏡自照)로 언제나 자신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털어 놓았다.
조선시대 성종은 '잘못을 지적 받지 못하는 것 보다 더 큰 아픔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승지와 사관·육조·삼사 등의 우두머리를 불러 놓고 각각 붓 40자루와 먹 20개씩을 주어 "이 필묵은 딴 데 쓰지 말고 오로지 나의 과실을 써 올리는데만 쓰되 빨리 닳을수록 크게 은사(恩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필묵(賜筆墨)은 후세 임금의 모범을 보인 표본이 되었다. 이를 본받아 앞으로의 위정자는 가장 신랄하게 비평하는 언론이나 단체 및 개인에게 푸짐한 포상을 한다면 '새마을 운동'의 견학을 능가하는 세계적 관심이 '위정(爲政)의 꽃'구경으로 동방의 코리아로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이치로 보인다.
어진 임금 세종은 자신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 황희와 이직을 왕위에 오른 뒤 귀양지에 있는 그들을 불러 올려 정승의 관직에 다시 중용시켰다. 이런 도량과 관용지겸손은 지금의 위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영 백년하청만은 아닐 터인데 다만 나라의 형세가 어쩌다 궤도 이탈해서 온 국가의 동량으로서는 너무나 협량의 심지(心志)들과 잠시 해후하게 된 것 뿐이니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어릴 때 신동이라 불린 서거정은 대사헌을 두 번이나 지내면서 조선시대 언관(사헌부·사간원 관리)은 임금에게 항상 바른 말을 하여 그릇된 언행이 없도록 보필할 책임이 있어 항상 감시하고, 빗나가는 것을 막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북돋아 주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는 언관의 기개를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치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나라가 잘 되면 명군이 되고 명군 밑에 충신 있게 마련이라고 간언을 격려하였다. <계속>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도쿠가와는 측근을 물리치고 후지와라의 문인인 기노시타 데이강이 길러낸 이른바 '기노몽(木門) 5선생과 10철(哲)'이 등용되어 도쿠가와 치하의 문권, 교권,정권에 관여하여 소신 끝 역량을 펼쳐 나라의 안정과 문예부흥을 일으켜 그 유업이 15대장군 256년간 한국과 가장 좋은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도쿠가와의 진면목의 진수는 "중신 간부가 자신과 마음이 맞는 부리기 쉬운 사람만을 중시하면 진정 인재는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측근을 멀리하고 정말로 인재는 없는가 하고 보물을 찾는 의욕으로 넓고 깊게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정치 덕목의 첫째를 용인(用人·인사관리)에 두고, 다음에 이재(利財·경제정책)에 치중하여 통치 치적에 승부를 걸었다. 이 두 가지도 오로지 학문에서 유래한다고 굳게 믿었다. 사실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지 않고 인간의 정신으로 창조해낸 수많은 물건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책의 세계다"라는 말은 인간이 언어동물로 남아 있는 한 변함없는 진리임을 굳게 신봉한 듯 도서관에서의 출판 사업에 전력투구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에 '아즈마가가미(吾妻鏡)'라는 책이 있는데 주제는 나의 잘잘못은 곧 아내의 얼굴에서 나타나므로, 아내를 살펴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통치자의 공과는 백성들이 쓴 글속에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이 책을 펼쳐보고 각별히 백성들의 여론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당나라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나는 거울로 의관을 보고, 역사로 나라의 흥망성쇠를 보고, 백성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통치술을 비추어 본다"는 세 가지 거울인 삼경자조(三鏡自照)로 언제나 자신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털어 놓았다.
조선시대 성종은 '잘못을 지적 받지 못하는 것 보다 더 큰 아픔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승지와 사관·육조·삼사 등의 우두머리를 불러 놓고 각각 붓 40자루와 먹 20개씩을 주어 "이 필묵은 딴 데 쓰지 말고 오로지 나의 과실을 써 올리는데만 쓰되 빨리 닳을수록 크게 은사(恩賜)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필묵(賜筆墨)은 후세 임금의 모범을 보인 표본이 되었다. 이를 본받아 앞으로의 위정자는 가장 신랄하게 비평하는 언론이나 단체 및 개인에게 푸짐한 포상을 한다면 '새마을 운동'의 견학을 능가하는 세계적 관심이 '위정(爲政)의 꽃'구경으로 동방의 코리아로 몰려들 것은 자명한 이치로 보인다.
어진 임금 세종은 자신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 황희와 이직을 왕위에 오른 뒤 귀양지에 있는 그들을 불러 올려 정승의 관직에 다시 중용시켰다. 이런 도량과 관용지겸손은 지금의 위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영 백년하청만은 아닐 터인데 다만 나라의 형세가 어쩌다 궤도 이탈해서 온 국가의 동량으로서는 너무나 협량의 심지(心志)들과 잠시 해후하게 된 것 뿐이니 희망은 얼마든지 남아있다.
어릴 때 신동이라 불린 서거정은 대사헌을 두 번이나 지내면서 조선시대 언관(사헌부·사간원 관리)은 임금에게 항상 바른 말을 하여 그릇된 언행이 없도록 보필할 책임이 있어 항상 감시하고, 빗나가는 것을 막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을 북돋아 주는 것을 사명으로 하였다. 그는 언관의 기개를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치 않는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고, 나라가 잘 되면 명군이 되고 명군 밑에 충신 있게 마련이라고 간언을 격려하였다. <계속>
前 국사편찬위원회 사서실장 …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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