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강제 철거`... 상주 인봉동 `상주읍성 성벽` 최초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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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연 작성일21-03-30 19:14본문
↑↑ 상주읍성 성벽 기저부. 상주시 제공
[경북신문=황창연기자] 상주시 인봉동에서 상주읍성의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상주읍성 성벽이 확인됨에 따라 시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상주읍성 복원 사업에 탄력을 받게 됐다”며 “앞으로도 상주읍성의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일 것”이라고 30일 밝혔다.
상주시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인봉동 35-5번지 유적(면적 233㎡)에서 발굴됐으며 성벽은 체성부(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저부(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시설)만 확인됐다.
↑↑ 조사대상지 위치 및 상주읍성 추정 성벽 해자범위. 상주시 제공
이는 1912년 일제가 헐어서 치워버릴 당시 지상의 성벽이 철거됐고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적도상에 ‘성도(城道)’로 표기한 것도 이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벽 자리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 760㎝ 정도로, 조사 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이어져 있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 정도만 확인됐고 나머지는 유실됐다. 높이는 40㎝ 정도만 확인됐으나 성벽 기저부를 견고하게 축조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고 5매만 확인됐으며 이 역시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되는 양상이다.
↑↑ 읍성 성벽 기저부 성토층 토층. 상주시 제공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 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해 훼철된 성벽의 큰 성돌이 다수 사용됐음이 확인됐다.
축조 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돼 조선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된 후 일제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520년 이상 유지됐다.
↑↑ 읍성 성벽 지대석 내외부 토층. 상주시 제공
고려말 왜구 침임에 대비해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 경상감영(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 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을 둠으로써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했을 뿐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2019년 조사 대상지의 북서쪽 40m 지점인 인봉동 73-7번지 유적에서 상주시 상주박물관이 시행한 상주읍성의 해자가 처음으로 발굴된 성과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조사 대상지가 일제 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했고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 상주성도 중 상주읍성 부분(고 강주진 소장본). 상주시 제공
지금까지 상주읍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 해자 조사에 이어 이번 성벽 기저부 조사가 두 번째다.
이번 한국문화재재단의 조사는 소규모 면적에 대한 성벽의 기저부 조사지만, 문헌 기록으로만 확인되던 상주읍성 성벽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히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상주시는 이를 통해 상주읍성의 전체 위치 등을 찾는 한편 읍성 정비·복원의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황창연 h5350807@hanmail.net
[경북신문=황창연기자] 상주시 인봉동에서 상주읍성의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강영석 상주시장은 “지역에서 처음으로 상주읍성 성벽이 확인됨에 따라 시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상주읍성 복원 사업에 탄력을 받게 됐다”며 “앞으로도 상주읍성의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일 것”이라고 30일 밝혔다.
상주시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인봉동 35-5번지 유적(면적 233㎡)에서 발굴됐으며 성벽은 체성부(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저부(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시설)만 확인됐다.
↑↑ 조사대상지 위치 및 상주읍성 추정 성벽 해자범위. 상주시 제공
이는 1912년 일제가 헐어서 치워버릴 당시 지상의 성벽이 철거됐고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적도상에 ‘성도(城道)’로 표기한 것도 이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벽 자리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 760㎝ 정도로, 조사 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이어져 있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 정도만 확인됐고 나머지는 유실됐다. 높이는 40㎝ 정도만 확인됐으나 성벽 기저부를 견고하게 축조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고 5매만 확인됐으며 이 역시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되는 양상이다.
↑↑ 읍성 성벽 기저부 성토층 토층. 상주시 제공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 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해 훼철된 성벽의 큰 성돌이 다수 사용됐음이 확인됐다.
축조 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돼 조선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상주읍성은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된 후 일제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520년 이상 유지됐다.
↑↑ 읍성 성벽 지대석 내외부 토층. 상주시 제공
고려말 왜구 침임에 대비해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 경상감영(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 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을 둠으로써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했을 뿐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2019년 조사 대상지의 북서쪽 40m 지점인 인봉동 73-7번지 유적에서 상주시 상주박물관이 시행한 상주읍성의 해자가 처음으로 발굴된 성과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조사 대상지가 일제 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했고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 상주성도 중 상주읍성 부분(고 강주진 소장본). 상주시 제공
지금까지 상주읍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는 2019년 해자 조사에 이어 이번 성벽 기저부 조사가 두 번째다.
이번 한국문화재재단의 조사는 소규모 면적에 대한 성벽의 기저부 조사지만, 문헌 기록으로만 확인되던 상주읍성 성벽의 실체와 위치를 정확히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상주시는 이를 통해 상주읍성의 전체 위치 등을 찾는 한편 읍성 정비·복원의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황창연 h53508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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