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들에게 길을 묻다] 돈황봉 `능가사자기`선종 자료 연구 매진한 김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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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작성일21-01-06 19:47본문
↑↑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경북신문=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구원장 김중순]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II. 연구의 초기 참여자들
2. 김구경(1899~1950)
김구경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불교학자로 특히 선종 자료의 연구에 매진한 학자이다. 돈황의 선종 사본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연구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실크로드 학자로 부를 수 있다. 그는 교토의 오타니(大谷)대학을 졸업하고 저명한 선종 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사사하였으며,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북경대학에서 언어학 강의도 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대와 연세대에 출강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되었다. 김중세가 유럽에서 실크로드학을 시작했다면, 김구경은 중국에서 실크로드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구경이 돈황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있으면서 관련 연구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에 1차로 출판된 돈황본 '능가사자기'에는 태허(太虛)와 호적의 서문이 들어가 있다. 그로부터 2년 후(1933)에는 심양(瀋陽)에서 '교간당사본능가사자기(校刊唐寫本楞伽師資記)'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재교정본에는 태허의 서문이 빠지고, 대신 김구경의 자서(自序)와 호적이 김구경에게 보낸 편지가 새롭게 들어가 있다. 1931년본과 1933년본 모두 앞쪽에 왕유(王維)의 '대당대안국사고대덕정각사탑명(大唐大安國寺故大德淨覺師塔銘)'을 싣고 있다. '정각(淨覺)'은 당대(唐代) 초중반에 활동한 선승으로서 '능가사자기'의 저자이다. 교정본을 처음 출간하면서 저자의 전기까지 함께 편집해 넣어 자료로서의 가치와 효용성을 높인 것이다. 서문을 쓴 태허(1890-1947)는 법명이 유심(唯心), 호는 매암(昧庵)으로 중국 근대의 유명한 불교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서문에서, 돈황 사본이 중외(中外)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고 '능가사자기'도 그 중 하나라고 말한 후 김구경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김구경 군은 여러 언어와 문자에 정통하고 선종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능가사자기'를 얻어 선(禪)의 근원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정밀하게 교감 간행하였으며, 아울러 나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호적의 서문은 태허의 서문보다 더욱 상세하며, 호적 자신이 파리와 런던에서 돈황본 '능가사자기'를 보고 영인해서 귀국했다는 것, 그리고 김구경이 자신의 자료를 빌려서 교감하고 출판했다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민국 15년(1926) 9월 8일, 나는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돈황 사본 '능가사자기'를 읽었다. 당시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보았다. 얼마 후 나는 런던으로 돌아와 대영박물관에서 별본(別本)을 한 가지 더 읽었다. 나는 이 두 사본의 영인을 부탁해서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로 5년 동안 나는 이 책을 출판하고자 했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금년에 조선의 김구경 선생이 내가 가지고 있던 두 종의 파리와 런던 돈황 사본을 빌려가서 교정한 후 정본으로 만들고 활자로 인쇄하였다. 인쇄를 마친 후 김선생은 내게 교감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서문도 써달라고 했다. 나는 김선생이 내가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으므로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胡適. 民國二十年十一月十五夜)
1931년 '능가사자기'가 은사인 스즈키 다이세츠의 당부에 따라 다소 급하게 초사와 교정을 겸하여 작업한 것이라면, 이 1933년본 교간당사본 '능가사자기'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온전히 자신의 연구결과물로 출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31년 본에는 없는 자서를 새롭게 넣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서문은 김구경의 일본 유학시절 은사인 스즈키 다이세츠와 호적의 학술 교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능가사자기'를 초사하고 교정하고 출판하기까지의 경위와 과정이 잘 밝혀져 있다. 은사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문 저작인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의 비평을 의뢰하며 호적과 만나고, 스즈키 다이세츠의 당부로 호적이 소장하고 있던 돈황본 '능가사자기'를 초사하는 과정에서 대교(對校) 작업까지 병행하여 몇 가지 곡절을 거친 후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가사자기'는 선종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초기 선종의 중요 경전인 '능가경'을 번역한 남조 송(宋)의 구나발타라를 초조(初祖)로 삼고 보리달마를 이조(二祖)로 삼아, '능가경'의 학문을 전승한 8세대 총 13명의 전기를 그들의 사상과 함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돈황본 '능가사자기'는 이 자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본으로서 중국 선종의 연구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역대 대장경에는 이 '능가사자기'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근대에 들어와서야 일본이 "대영박물관 소장의 돈황 사본을 저본으로 하고 1931년 김구경의 정리본을 교보본(校補本)으로 하여 이 자료를 '대정신수대장경' 제85권에 넣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대(唐代)의 티베트어 돈황 사본 선종문헌 중에도 '능가사자기'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이 대표적인 선종문헌으로서 당시에 상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돈황본 '능가사자기'의 존재와 그 가치를 최초로 인식한 학자는 호적이었지만, 이 사본을 초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김구경이 처음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선종 학자들이 '능가사자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고,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된 '능가사자기'가 김구경의 교정본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초창기 한국 돈황학 나아가 불교 연구사에 있어서 김구경이 갖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II. 연구의 초기 참여자들
2. 김구경(1899~1950)
김구경은 경성제국대학 교수이자 불교학자로 특히 선종 자료의 연구에 매진한 학자이다. 돈황의 선종 사본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연구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실크로드 학자로 부를 수 있다. 그는 교토의 오타니(大谷)대학을 졸업하고 저명한 선종 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사사하였으며,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북경대학에서 언어학 강의도 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대와 연세대에 출강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행방불명되었다. 김중세가 유럽에서 실크로드학을 시작했다면, 김구경은 중국에서 실크로드학을 연구한 사람이다.
김구경이 돈황본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 있으면서 관련 연구자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에 1차로 출판된 돈황본 '능가사자기'에는 태허(太虛)와 호적의 서문이 들어가 있다. 그로부터 2년 후(1933)에는 심양(瀋陽)에서 '교간당사본능가사자기(校刊唐寫本楞伽師資記)'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재교정본에는 태허의 서문이 빠지고, 대신 김구경의 자서(自序)와 호적이 김구경에게 보낸 편지가 새롭게 들어가 있다. 1931년본과 1933년본 모두 앞쪽에 왕유(王維)의 '대당대안국사고대덕정각사탑명(大唐大安國寺故大德淨覺師塔銘)'을 싣고 있다. '정각(淨覺)'은 당대(唐代) 초중반에 활동한 선승으로서 '능가사자기'의 저자이다. 교정본을 처음 출간하면서 저자의 전기까지 함께 편집해 넣어 자료로서의 가치와 효용성을 높인 것이다. 서문을 쓴 태허(1890-1947)는 법명이 유심(唯心), 호는 매암(昧庵)으로 중국 근대의 유명한 불교 사상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서문에서, 돈황 사본이 중외(中外) 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고 '능가사자기'도 그 중 하나라고 말한 후 김구경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김구경 군은 여러 언어와 문자에 정통하고 선종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 '능가사자기'를 얻어 선(禪)의 근원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정밀하게 교감 간행하였으며, 아울러 나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호적의 서문은 태허의 서문보다 더욱 상세하며, 호적 자신이 파리와 런던에서 돈황본 '능가사자기'를 보고 영인해서 귀국했다는 것, 그리고 김구경이 자신의 자료를 빌려서 교감하고 출판했다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민국 15년(1926) 9월 8일, 나는 파리국립도서관에서 돈황 사본 '능가사자기'를 읽었다. 당시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보았다. 얼마 후 나는 런던으로 돌아와 대영박물관에서 별본(別本)을 한 가지 더 읽었다. 나는 이 두 사본의 영인을 부탁해서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로 5년 동안 나는 이 책을 출판하고자 했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금년에 조선의 김구경 선생이 내가 가지고 있던 두 종의 파리와 런던 돈황 사본을 빌려가서 교정한 후 정본으로 만들고 활자로 인쇄하였다. 인쇄를 마친 후 김선생은 내게 교감을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서문도 써달라고 했다. 나는 김선생이 내가 오래도록 하고 싶었던 작업을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으므로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胡適. 民國二十年十一月十五夜)
1931년 '능가사자기'가 은사인 스즈키 다이세츠의 당부에 따라 다소 급하게 초사와 교정을 겸하여 작업한 것이라면, 이 1933년본 교간당사본 '능가사자기'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온전히 자신의 연구결과물로 출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31년 본에는 없는 자서를 새롭게 넣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 서문은 김구경의 일본 유학시절 은사인 스즈키 다이세츠와 호적의 학술 교류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능가사자기'를 초사하고 교정하고 출판하기까지의 경위와 과정이 잘 밝혀져 있다. 은사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문 저작인 Studies in the Lankavatara Sutra의 비평을 의뢰하며 호적과 만나고, 스즈키 다이세츠의 당부로 호적이 소장하고 있던 돈황본 '능가사자기'를 초사하는 과정에서 대교(對校) 작업까지 병행하여 몇 가지 곡절을 거친 후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능가사자기'는 선종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초기 선종의 중요 경전인 '능가경'을 번역한 남조 송(宋)의 구나발타라를 초조(初祖)로 삼고 보리달마를 이조(二祖)로 삼아, '능가경'의 학문을 전승한 8세대 총 13명의 전기를 그들의 사상과 함께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돈황본 '능가사자기'는 이 자료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본으로서 중국 선종의 연구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때문에 역대 대장경에는 이 '능가사자기'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근대에 들어와서야 일본이 "대영박물관 소장의 돈황 사본을 저본으로 하고 1931년 김구경의 정리본을 교보본(校補本)으로 하여 이 자료를 '대정신수대장경' 제85권에 넣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대(唐代)의 티베트어 돈황 사본 선종문헌 중에도 '능가사자기'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이 대표적인 선종문헌으로서 당시에 상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돈황본 '능가사자기'의 존재와 그 가치를 최초로 인식한 학자는 호적이었지만, 이 사본을 초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김구경이 처음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선종 학자들이 '능가사자기'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고, '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된 '능가사자기'가 김구경의 교정본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초창기 한국 돈황학 나아가 불교 연구사에 있어서 김구경이 갖는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계속>
계명대 실크로드 중앙아시아연…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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